
북한이 최근 과거 기록영화 일부 장면을 수정하거나 삭제한 정황이 포착되면서, 김정은 체제의 ‘적대적 두 국가’ 기조가 선대 지도자 시대의 기록에도 소급 적용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단순한 편집 변화가 아니라 남북관계에 대한 역사 서술을 다시 구성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다.
SBS 보도에 따르면 조선중앙TV는 김일성 사망 32주기였던 지난 8일 약 70분 분량의 김일성 찬양 기록영화를 방영했다. 이 영상에는 김일성이 해외 인사들과 지구본을 살펴보는 장면이 포함됐는데, 한반도 지도에서 남과 북의 색깔이 서로 다르게 표시된 모습이 확인됐다.
같은 제목의 2017년 방영분에서는 한반도가 하나의 붉은 계열 색으로 표현돼 있었다. 영상의 다른 요소들은 대체로 유지된 것으로 보이지만, 지도 속 남북 구분만 달라졌다는 점에서 의도적 수정 가능성이 제기된다.
지도 색상과 통일 장면의 변화
수정 정황은 지도 색상에만 그치지 않는다. 김일성이 ‘통일’이라고 적힌 깃발을 해외 인사에게서 받는 장면, 김정일이 한반도 남쪽까지 포함된 벽면 지도를 바라보는 장면은 최근 방영분에서 빠진 것으로 전해졌다. 과거 영상의 상징적 장면을 통째로 덜어낸 셈이다.

북한은 올해 3월 헌법을 고쳐 영토 관련 조항을 신설하고 통일 관련 표현을 삭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관계를 더 이상 같은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가 아니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한 이후, 선전 매체의 표현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번 사례가 주목받는 이유는 수정 대상이 김일성·김정일 관련 기록이라는 점이다. 북한 체제에서 선대 지도자의 업적과 발언은 정통성의 핵심 자산이다. 그런 기록까지 현재 노선에 맞게 다시 편집했다면, 북한 내부 선전의 기준점이 상당히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통일 담론 지우기와 세대 교육
전문가들은 북한이 과거 ‘하나였다가 분단됐다’는 서사보다 처음부터 별개의 국가였다는 식의 인식을 강화하려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항일운동사, 건국사, 남북관계사를 다시 배열하는 문제와도 연결된다. 기존 통일 담론을 약화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적 기억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라는 해석이다.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한 교육 효과도 중요한 변수다. 북한 주민, 특히 김정은 체제 이후 성장한 세대에게 남북이 같은 민족이라는 관념을 희미하게 만들면 향후 대남 정책의 급격한 전환에도 내부 반발을 줄일 수 있다. 기록영상 수정은 이런 장기적 선전 전략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공개 영상 일부의 편집만으로 북한 내부 정책 전체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헌법 개정, 통일 표현 삭제, 남북관계 재규정, 선전물 수정이 같은 방향으로 이어진다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각각의 조치가 따로 떨어진 사건이라기보다 하나의 노선 정비 과정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에 남기는 신호
북한이 선대 지도자 관련 자료까지 바꾸는 것은 대외 메시지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남한과의 관계를 협상 가능한 특수관계가 아니라 별도 국가 간 적대관계로 고정하려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는 향후 군사·외교적 긴장 관리에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한국 정부와 국제사회 입장에서는 북한의 공식 문구뿐 아니라 방송, 교과, 기록물, 기념행사에서 반복되는 표현 변화를 함께 추적할 필요가 있다. 북한 체제에서 선전 매체는 내부 지침과 대외 메시지를 동시에 반영하는 창구이기 때문이다.
이번 영상 수정 정황은 북한의 남북관계 인식 변화가 현재 정책 구호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 서사 재편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북한이 다른 기록물과 교육 자료에서도 통일 관련 상징을 지워 나갈지에 따라 ‘적대적 두 국가론’의 제도화 수준이 더 분명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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