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에 속아 8천여만원을 뜯긴 피해자가, 이후 조직의 지시를 받아 돈을 수거·전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춘천재판부 형사1부는 통신사기피해환급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강원지역 한 지자체 공무원 A(42)씨에게 원심과 마찬가지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고 10일 밝혔다.
재판부는 조직의 존재와 범행의 성격을 알았거나 ‘가담’하려는 고의가 충분히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다만 A씨가 피해를 겪고도 수차례 현금 수거·전달에 관여한 정황이 있는 만큼, 유사 사건에서 ‘고의’ 판단이 어떤 기준으로 이뤄질지에 관심이 쏠린다.
‘불법 자금 환수’ 명목…피해자가 수거책이 된 과정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A씨는 2024년 3~4월 보이스피싱 조직의 현금 수거책을 맡아 피해자 7명으로부터 약 8억여원을 받아 조직에 넘긴 혐의로 기소됐다. 조직원들은 검찰·검찰 수사관 등을 사칭하며, 피해자들에게 “당신 명의로 대포통장이 만들어져 범행에 사용됐다. 불법 자금인지 확인해야 하니 돈을 인출해 우리가 보내는 금융감독원 직원에게 건네라”는 취지로 속였다.
문제는 A씨가 범행 가담자로만 출발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조직에 속아 피해를 봤다는 점이다. 조사 결과 A씨는 조직원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속아 8천80만원을 뜯겼고, 4월에서야 범행을 인지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후 조직원들은 “A씨 때문에 다른 피해자들도 조사를 받고 있고, 그들이 가진 현금은 불법 자금이니 국고에 환수되도록 도와달라”며 A씨에게 협조를 요구했고, A씨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현금 수거·전달에 관여하게 됐다.
법원이 본 쟁점은 ‘고의성’…피해 직후의 반응과 태도
A씨 측은 조직원들의 가스라이팅(심리 조작)에 의해 자신의 행위가 보이스피싱 범죄의 일부라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조직의 대출 종용으로 빚까지 생겼다고 주장했다. 또한 현금을 수거해 전달하는 과정에서 피해금을 중간에 가로채거나 별도 이득을 취하려 한 정황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1심은 “조직원에게 속아 보이스피싱인지 알지 못한 채 돈을 편취당하는 피해를 본 피고인이, 보이스피싱의 관여를 인식하고 조직원에게 합세해 피해자들로부터 돈을 편취했다는 공소사실은 모순”이라며 무죄를 판단했다. 2심도 결론은 같았다.
서울고법은 A씨가 현금을 수거·전달하는 과정에서 위법 행위가 개입됐다고 의문을 품을 만한 능력이 있었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보이스피싱 수법이 갈수록 진화하고, 통상의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도 피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속는 경우가 여전히 발생한다는 현실을 함께 고려했다.
“피해 직후 곧바로 관여했다”는 점이 오히려 고의 부재로 이어져
재판부가 특히 주목한 대목은 ‘사건의 타이밍’과 ‘행위의 성격’이다. 법원은 이 사건이 A씨가 조직원들에게 다시 피해를 당하는 구조 속에서 전개됐으며, A씨가 현금을 수거·전달에 관여한 것은 피해를 입은 직후였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A씨는 현금을 수거·전달하는 도중에도 추가로 370만원을 편취당하는 피해까지 봤다.
또한 재판부는 A씨가 현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범행을 보전하려는 시도를 했거나, 다른 보이스피싱 사건들에서의 수사 결과가 무죄 판단의 근거가 됐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공소 내용처럼 A씨가 ‘조직의 범행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고 단정하기에는, 피해자이자 조작의 대상이었던 정황이 강하다는 평가다.
중형 수사를 피할 수 없던 ‘수거책’ 사건, 앞으로는 판단 기준이 더 중요해질 듯
이번 판결은 보이스피싱 범죄가 ‘현금 수거책’을 통해 현금의 흐름을 끊어내고 조직의 실체를 더 어렵게 만드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수거책은 조직 입장에서 최종적으로 돈을 확보해 전달하는 핵심 역할이지만, 법원이 그 과정에서의 인식(고의) 여부를 엄격히 따졌다는 점이 이번 판결의 핵심으로 읽힌다.
앞으로 유사 사건에서 경찰과 검찰은 피고인의 의식 상태를 어떻게 입증할지(조직이 실제로 보이스피싱임을 인식했는지, 단순 피해인지, 적극 가담인지)에 더 공을 들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피고인 측은 가스라이팅, 피해 직후의 상황, 추가 피해 정황 등 ‘인식 결여’를 보여주는 요소를 강화해 다툴 것으로 보인다.
무죄 확정의 여진…보이스피싱 예방의 ‘정서적 장치’도 다시 주목
법원이 강조한 것처럼 보이스피싱은 단순 사기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공권력·공적기관을 내세워 심리적 압박을 가하고 행동을 지시하는 형태로 진화해왔다. 따라서 수거책으로 끌려 들어가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겪는 혼란과 위협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리고 이를 피해자가 스스로 판단해 끊어낼 수 있는지 역시 중요해진다.
이번 판결이 확정되면 A씨의 사건은 무죄로 정리되겠지만, 보이스피싱 수법의 진화 속도에 비해 법적 판단의 기준은 결국 사건별 사실관계에 의존한다. 향후 항소심 판결의 논리와 ‘고의성’ 판단 방식이 다른 사건들에도 영향을 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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