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미시간대가 신입생의 첫 학기 성적표에서 A부터 F까지의 문자 학점을 없애고 수료 여부만 표시하는 제도를 도입한다. 대학가의 학점 인플레이션과 신입생의 학업 스트레스가 커지는 상황에서 첫 학기를 적응 기간으로 운영하려는 변화다.
보도에 따르면 미시간대는 내년부터 1학년 1학기 성적을 통과 또는 미통과 방식으로 기록하기로 했다. 해당 학기의 세부 학점은 외부 성적표에 나타나지 않고 평균평점에도 반영되지 않는다. 다만 교수들은 장학금과 학술상 선정을 위해 내부 성적을 산정해 관리한다.
제도 변경의 배경에는 높은 학점이 지나치게 보편화하면서 성적의 구분 기능이 약해졌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미시간대에서 2022년 학부 성적 중 A+, A, A-가 차지한 비율은 74.1%로, 10년 전 57.6%보다 크게 높아진 것으로 전해졌다.
첫 학기를 적응 기간으로
대학에 입학한 학생은 고교와 다른 수업 속도와 평가 방식, 생활 환경에 한꺼번에 적응해야 한다. 첫 학기 성적이 전체 평균평점에 바로 반영되면 새로운 분야를 탐색하기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과목을 선택하려는 유인이 커질 수 있다.
통과·미통과 제도는 이런 부담을 낮춰 학생이 수업 방식에 익숙해지고 관심 분야를 시험할 여지를 주려는 취지다. 성적표에 문자 등급이 남지 않더라도 과목을 통과하려면 일정 수준의 학업 성취가 필요하다. 따라서 평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 표시와 평균평점 반영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학생들은 대체로 제도 변화를 환영하는 분위기로 전해졌다. 미시간대 학생회장은 학생들의 정신건강 문제가 학업 스트레스와 불안에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며, 높은 성적 압박이 줄면 수업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취지로 평가했다.

학점 인플레이션 논쟁
학점 인플레이션은 시간이 흐르면서 높은 학점을 받는 학생 비율이 증가해 성적의 변별력이 낮아지는 현상을 뜻한다. 교수의 평가 관행, 학생 만족도, 취업과 대학원 진학 경쟁, 코로나19 시기의 유연한 평가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높은 학점이 많아지면 학생의 성취가 향상된 결과인지 평가 기준이 완화된 결과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기업과 대학원은 성적만으로 지원자를 비교하기 어려워지고, 학생은 소수의 낮은 학점이 상대적으로 더 큰 불이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을 느낀다.
일부 대학은 높은 학점의 비율을 제한하거나 평가 기준을 다시 정하는 방식을 검토한다. 반면 미시간대처럼 첫 학기의 세부 학점을 가리는 방식은 경쟁 압력을 줄이는 데 초점을 둔다. 같은 문제를 두고 변별력을 강화하는 접근과 성적의 영향 자체를 낮추는 접근이 동시에 나타나는 셈이다.
기초학력 지원과 함께 가야
성적제도 변화에는 신입생의 학업 준비도 격차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보도에 인용된 UC샌디에이고 교수진 보고서에 따르면 프리칼큘러스 전에 초·중학교 수준의 수학 보충수업이 필요한 학생 비율이 2020년 0.5%에서 2025년 8.5%로 늘었다.
첫 학기 성적 부담을 덜어주는 것만으로 기초학력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진단평가와 보충수업, 튜터링, 교수 상담을 제공해 부족한 영역을 실제로 채워야 한다. 성적이 공개되지 않는 기간에 학습 격차를 방치하면 이후 전공 수업에서 어려움이 커질 수 있다.
대학은 학생에게 내부 평가 결과와 구체적인 피드백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외부 성적표가 통과로만 표시돼도 학생은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아야 다음 학기의 과목을 선택할 수 있다. 장학금과 학술상에 내부 점수를 활용하는 기준도 투명하게 설명돼야 공정성 논란을 줄일 수 있다.

효과를 둘러싼 엇갈린 전망
MIT와 캘리포니아공대 등도 신입생을 위한 유사한 성적 비공개 제도를 운영한 사례가 있다. 이 제도는 경쟁이 치열한 대학에서 학생이 새로운 학문을 시도하고 동료와 협력하도록 돕는다는 평가를 받지만, 학교와 전공의 특성에 따라 효과가 다를 수 있다.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성적 인플레이션으로 학점의 의미가 이미 크게 변한 상황에서 한 학기 표시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이후 학기에 경쟁이 집중되거나, 인턴십과 전과 심사에서 다른 비공식 지표의 영향이 커질 가능성도 살펴봐야 한다.
제도의 성패는 학생의 학습 수준과 정신건강, 과목 선택이 실제로 어떻게 변하는지에 달려 있다. 첫 학기 이수율, 중도 이탈, 상담 이용, 이후 평균평점과 전공 진입 결과를 장기간 비교해야 효과를 판단할 수 있다. 학생 집단별 차이가 생기는지도 중요한 평가 항목이다.
미시간대의 결정은 성적이 학습을 촉진하는 도구인지 경쟁을 강화하는 숫자인지 다시 묻게 한다. 첫 학기의 부담을 줄이는 시도는 분명한 목적을 갖지만, 충분한 피드백과 학업 지원이 함께 제공돼야 한다. 새로운 제도가 학점 인플레이션과 대학 적응 문제에 어떤 변화를 만들지는 시행 이후의 자료로 확인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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