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과 이란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호르무즈해협 운항 제한이 4개월째 이어지면서 미국의 원유·석유제품 재고가 22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에너지정보청(EIA) 집계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기준(현지시간 3일 발표) 미국의 전체 원유(전략비축유 포함) 및 석유 제품 재고는 15억7천만 배럴로, 일주일 전보다 1천60만 배럴 감소했다. 재고 부족이 장기화할 경우 유가가 더 뛰며 글로벌 에너지 비용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재고 22년 만에 최저…“비축유도 가파르게 감소”
EIA에 따르면 미국의 상업용 원유 재고는 같은 기간 4억3천370만 배럴로, 일주일 전보다 800만 배럴 감소했다. 전문가 전망치(400만 배럴 감소)를 웃도는 하락 폭으로, 시장이 체감하는 타이트한 수급 긴장을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전략비축유 재고 역시 3억5천712만 배럴로 1주 전보다 800만 배럴 줄며, 2024년 1월 이후 가장 적은 수준으로 하락했다.
블룸버그 칼럼니스트 하비에르 블라스는 공개 글에서 “현재와 같은 방출 속도가 유지되면 전략비축유는 조 바이든 행정부 당시 최저 수준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1983년 이후 최저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취지로, 비축유가 단순한 ‘완충 장치’가 아니라 실제로 시장 수급을 떠받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수출 급증과 수요 이동이 ‘빠른 재고 소진’에 기여
미국 재고 감소에는 수요 측 요인도 작용했다. 특히 이란 전쟁 발발 이후 중동 지역의 공급 불안으로 미국산 원유에 대한 수요가 아시아와 유럽 정유사로 빠르게 이동한 것으로 전해졌다. 로이터가 에너지 분석 기업 케이플러 등의 선박 추적 데이터를 인용해 집계한 결과, 5월 미국의 원유 수출량은 하루 평균 560만 배럴로 4월(하루 520만 배럴) 대비 증가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가격 경쟁력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미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글로벌 기준인 브렌트유 대비 할인된 가격에 거래되며 구매 유인을 키웠다. 3월 한때 브렌트-WTI 가격 격차가 배럴당 20달러까지 벌어지기도 했지만, 이날 종가 기준으로는 1.79달러로 격차가 좁혀진 상태다. 그럼에도 할인 구조가 유지되면서 미국산으로 수급이 쏠리는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글로벌 공급 공백 10억 배럴 이상” — 업계는 추가 타격 우려
미국 에너지 업계에서도 재고 감소가 일시적이 아니라 구조적 위험 신호일 수 있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엑손모빌의 닐 채프먼 수석 부사장은 최근 콘퍼런스에서 “원유 선물시장이 이란 전쟁에 따른 공급 위기를 과소평가하고 있다”며 “글로벌 원유 재고가 향후 2~3주 내 극히 낮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재고가 특정 수준 이하로 내려가면 “가격이 치솟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호르무즈해협 봉쇄 이후 글로벌 시장에서는 누적 기준 10억 배럴 이상의 공급 공백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번 조사 결과(미국 재고의 급감)는 이러한 ‘공급 차질’이 실제 물량 감소로 이어져 시장의 완충 장치(재고)까지 빠르게 소진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시장 반응과 파급: 유가 변동성 확대 가능성
이런 흐름은 금융시장에서도 관측된다. 중동 긴장 재고조는 투자자들의 위험 회피를 자극하며 주식과 채권에 동반 하락 압력을 줬고, 동시에 유가에는 상방 요인이 되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뉴욕증시는 전반적으로 약세로 마감했지만, 에너지 시장에서는 재고 감소가 유가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 핵심 변수로 부각됐다.
재고가 낮아지는 국면에서는 작은 공급 차질에도 가격이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특히 전략비축유 방출이 이어질 경우, 향후 수급 불확실성이 커졌을 때 정부가 다시 대응할 ‘여력’이 줄어드는 부작용도 생길 수 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유가 상승 압력으로, 중장기적으로는 에너지 비용 상승과 인플레이션 우려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무엇을 봐야 하나: 호르무즈 운항과 비축유 방출 속도
앞으로 시장이 가장 주목할 지점은 두 가지다. 첫째, 호르무즈해협 운항 제한이 완화되는지 여부다. 제한이 지속되면 공급 차질 추정치가 현실화되며 재고 감소 흐름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둘째, 전략비축유 방출 속도가 유지·확대되는지다. 재고가 빠르게 소진될수록 ‘추가 방출’에 대한 기대와 비용 부담이 함께 커져 가격 경로가 더 불확실해질 수 있다.
에너지 수급은 지정학 변수에 크게 좌우된다. 유가가 재차 급등할 경우 정유 마진과 원가 전가, 기업 실적 전망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EIA의 다음 주간 재고 발표와 선박 데이터 기반 수출입 동향(미국산 원유의 수출 속도), 그리고 중동 지역의 운항 안정성 변화가 핵심 체크리스트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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