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형마트처럼 넓은 매장에서 일반의약품과 건강기능식품 등을 대량으로 판매하는 ‘창고형 약국’이 국내에 빠르게 늘고 있다. 첫 매장이 문을 연 지 약 1년 만에 전국 40여 곳까지 확산되는 가운데, 낮은 가격과 품목 다양성의 이점과 함께 복약 지도 부실로 인한 약물 오남용 우려가 커지면서 안전장치 마련을 둘러싼 논쟁도 본격화되고 있다.
“싸고 편하다”는 소비자 만족, 그러나 대량 구매의 그림자
서울 금천구의 한 대형마트 내 창고형 약국에서 손님들이 감기약, 진통제와 영양제 박스 등을 쇼핑 카트에 담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 지역에 사는 임은지 씨(36)는 “아기 모기약과 연고를 사러 왔는데, 다양한 상품을 비교할 수 있고 값도 싼 것 같아 만족한다”고 말했다. 매장 운영 측은 일반 약국보다 가격이 낮은 편이고,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을 제외한 일반의약품과 건기식·의약외품 등을 폭넓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운다.
실제로 창고형 약국은 일반 의약품의 경우 품목별로 일반 약국보다 10~30% 낮게 형성돼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또 매장 규모도 최소 500㎡에서 최대 5000㎡ 이상까지 다양해 한 번에 여러 품목을 구매하기 쉽다. 정부 역시 창고형 약국이 품목 다양성과 접근성 측면에서 소비자 편익을 제공한다고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오남용 우려가 있다는 점을 함께 보고 있다.
복약 지도 ‘부실’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
논란의 핵심은 계산대에서의 ‘설명’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이뤄지느냐에 있다. 약사 단체와 현장 전문가들은 창고형 모델이 ‘박리다매’ 구조로 운영될 경우, 복약 지도 없이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비슷한 효능의 제품을 다량으로 사가는 흐름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 매장에서는 아세트아미노펜, 이부프로펜 등 해열진통제 성분의 제품이나 감기약이 ‘1+1’ 같은 판촉 형태로 판매되는 장면도 관찰됐다. 특히 일부 감기약 성분(예: 슈도에페드린)은 과다 복용 시 심혈관계 부작용 위험이 커, 구매자가 용법·용량과 주의사항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대한약사회 측은 “약을 싸게 사는 건 단기적으로는 좋지만, 정확한 복약 지도가 없으면 오남용으로 이어져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또한 영업 환경상 건기식과 일반의약품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판매될 때, 상담이 효능·안전성 중심이 아니라 판매 흐름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예를 들어 잇몸 관련 증상에 대해 고객이 약사에게 특정 의약품 추천을 요구했을 때, 약사 상담에서는 건기식 쪽 구매를 더 권하는 사례가 거론됐다. 약사회 측은 “건기식은 이윤이 높아 상담이 건기식 판매 쪽으로 기울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하며, 의약품을 단순 상품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외는 ‘대형 약국 허용’ 대신 신분증·구매 이력·등급별 상담으로 관리
국내에서 구체적인 판매 기준과 복약 지도 의무가 상대적으로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해외는 대형 매장을 허용하되 오남용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를 촘촘히 설계해 왔다.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호주·미국·일본 등이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다.
호주 ‘케미스트 웨어하우스’ 모델에서는 오남용 위험이 큰 약사 전용 의약품을 계산대 뒤 별도 보관하고, 약사와의 상담을 거친 뒤에만 구매할 수 있다. 일부 제품은 신분증 확인과 구매 이력 추적도 의무화돼 있으며, 특정 성분(예: 슈도에페드린)이 마약류 제조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1인당 1팩 구매 제한이 적용되고, 여러 약국에서 중복 구매를 시도하면 전산망을 통해 판매가 차단되는 방식이 알려져 있다.
미국도 전국 단위 프랜차이즈 약국과 대형마트에서 일반의약품 판매가 이뤄지지만, 오남용 우려가 큰 품목은 신분증 확인, 구매 기록 등록, 구매량 제한 등으로 관리한다. 일본은 일반의약품을 위험도에 따라 1~3등급으로 구분해 등급별로 판매 방식이 달라지며, 위험도가 높은 제품은 약사와의 대면 상담 없이는 판매가 제한되는 구조다. 일부 품목은 소비자가 직접 꺼내지 못하게 진열하고, 복약 지도·부작용 안내도 의무화돼 있다고 전해진다.
동네 약국의 생존 위기와 ‘공존’ 해법의 과제
창고형 약국이 늘면서 동네 약국의 반발도 커지고 있다. 대한약사회가 창고형 약국 개설 인근의 약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는 응답자의 31.8%가 매출이 10~19% 줄었다고 답했고, 16%는 20~29% 감소를 경험했다고 응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동네 약국들은 환자와의 장기적 관계를 바탕으로 만성질환 관리, 복약 이력 확인 등 맞춤형 상담을 강화하며 생존 전략을 찾는 분위기다.
아울러 지역 보건 인프라 측면에서 동네 약국이 위축될 경우 취약계층의 의료 접근성이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 과정에서 정부 역시 창고형 약국의 확산이 국민 건강에 미칠 영향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으며, 네트워크 약국 방지와 명칭·광고 규제 등 관련 법·제도 보완 논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나
전문가들은 창고형 약국의 장점을 부정하기보다, 소비자 편익과 안전을 함께 달성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핵심은 오남용 우려가 큰 성분에 대한 판매 제한(신분증 확인, 구매량·기간 제한), 구매 이력 관리, 그리고 현장에서의 복약 지도 의무를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데 있다. 또한 건기식과 의약품의 판매 공간·상담 방식이 오해를 부르지 않도록 구분과 안내 체계도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What’s Next
앞으로는 창고형 약국을 둘러싼 규제 논의가 어떤 수준의 ‘안전 기준’으로 구체화되는지가 관건이다. 판매 품목 범위, 위험도 등급화 여부, 신분증·구매 이력 추적의 도입 범위, 복약 지도의 최소 요건 같은 세부 항목이 제도화될 가능성이 크다.
동시에 동네 약국과 창고형 약국이 공존하는 모델이 가능한지도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 가격 경쟁과 접근성 확대가 건강상 안전과 어떻게 균형을 이룰지에 따라, 소비자 선택의 방식과 약사 상담의 역할은 한동안 재편될 것으로 예상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