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DC의 국립미국사박물관 입구에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대형 동상을 세우자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현재 그 자리에 놓인 추상조각을 치우고 약 9.1m 높이의 이른바 ‘워싱턴 거상’을 설치하자는 주장이다. 박물관 전시와 공공미술을 둘러싼 논쟁이 다시 미국 정치의 문화전쟁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일 밤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미국사박물관 앞의 작품 ‘인피니티’를 교체해야 한다고 밝혔다. 호세 데 리베라가 제작해 1967년 설치된 이 작품은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든 추상조각으로, 워싱턴DC 주요 공공건물에 자리 잡은 초기 추상미술 작품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조각이 방문객에게 미국에 관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반면 조지 워싱턴에 대해서는 미국의 독립과 자유를 상징하는 가장 위대한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제안대로라면 박물관 입구의 시각적 상징이 현대 추상미술에서 건국 인물을 기념하는 기념비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
박물관 입구에서 다시 불붙은 ‘역사 전쟁’
이번 요구는 단순한 조형물 취향을 넘어 트럼프 행정부와 스미스소니언 재단 사이의 장기적인 갈등과 맞닿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단 산하 박물관과 미술관이 미국사의 부정적인 측면과 다양성·형평성·포용성 의제를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비판해 왔다. 반대로 문화계에서는 정치권이 전시의 학술적 독립성에 개입할 수 있다는 우려가 이어져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3월 스미스소니언 산하 기관에서 자신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이념을 걷어내고 미국의 위대함을 강조하라는 취지의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어 올해 7월 백악관 국내정책위원회는 ‘미국 역사 구하기’ 보고서를 내고 미국사박물관의 일부 전시와 해석을 비판했다. 박물관을 둘러싼 충돌이 일회성 발언이 아니라 행정부의 문화정책 방향과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사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박물관의 한 전시가 콜럼버스의 미 대륙 도착부터 미국 건국까지의 시기를 ‘대혼란’으로 표현한 점도 문제 삼았다. 그는 이런 서술이 스미스소니언의 역사 인식을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다만 특정 전시의 표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는 역사학자와 박물관 전문가, 정치권 사이에서 계속 논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스미스소니언을 이끌어 온 로니 번치 3세 사무총장은 올해 말까지만 근무한 뒤 물러나겠다고 지난 8일 발표했다. 그의 사임 배경 전체를 이번 갈등만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재단과 백악관의 긴장이 이어진 상황에서 나온 결정이라는 점 때문에 문화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공공미술 교체가 던지는 질문
공공장소의 조형물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사회가 어떤 인물과 가치를 기억할지 보여주는 상징이다. 기존 추상조각을 건국 영웅의 거상으로 바꾸자는 제안에는 국가 정체성을 보다 직접적이고 영웅 중심적으로 표현하려는 정치적 선택이 담겨 있다. 동시에 1960년대 공공미술의 역사적 가치와 현재의 전시 맥락을 어떻게 보존할지도 쟁점이 된다.
실제 교체가 이뤄지려면 행정적 권한과 재단의 의사결정 절차, 예산, 작품 소유 및 보존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소셜미디어 요구만으로 설치가 확정됐다고 볼 수는 없다. 스미스소니언 측의 공식 입장과 구체적인 추진 계획이 확인돼야 제안이 정치적 메시지에 그칠지 현실의 사업으로 이어질지 판단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자신이 조지 워싱턴과 나란히 말을 타거나 에이브러햄 링컨 옆에 앉은 모습을 담은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를 소셜미디어에 잇달아 게시했다. 백악관 동관 연회장으로 보이는 공간을 워싱턴에게 안내하는 장면도 공개했다. 이런 이미지는 현직 대통령을 건국과 통합의 상징인 역대 대통령들과 연결하려는 메시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다만 인공지능으로 만든 상징적 장면과 실제 역사 기록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정치인의 홍보 이미지가 빠르게 확산되는 환경에서는 이미지가 사실을 재현한 것인지, 비유적 메시지를 위해 제작된 것인지 이용자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번 사안은 박물관 전시뿐 아니라 정치 커뮤니케이션에서 생성형 AI가 기억과 권위를 구성하는 방식도 함께 보여준다.
학술적 독립성과 정치적 책임 사이
국립 문화기관은 공공재원을 사용하는 만큼 사회적 책임과 투명성을 요구받지만, 동시에 전문 연구와 전시 판단의 독립성도 보장돼야 한다. 어느 한쪽의 역사관만을 정답으로 강요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시가 흔들릴 수 있다. 반대로 시민의 비판과 공적 토론을 모두 전문성 침해로 돌리는 태도 역시 박물관의 신뢰를 높이기 어렵다.
향후 핵심은 백악관이 동상 설치를 공식 정책으로 추진하는지, 스미스소니언이 어떤 절차와 기준으로 대응하는지다. 작품의 교체 여부뿐 아니라 기존 ‘인피니티’의 보존 장소, 새 동상의 설계와 비용, 관련 전문가와 시민 의견 수렴 여부도 살펴야 한다. 공개된 절차가 충분해야 결과에 동의하지 않는 시민도 결정의 근거를 평가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은 미국이 스스로의 역사를 어떤 언어와 이미지로 설명할지를 둘러싼 논쟁을 집약한다. 조지 워싱턴을 기리는 일과 복잡한 역사 경험을 다층적으로 전시하는 일은 반드시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적 대립 속에서는 조형물 하나의 교체도 국가 정체성과 문화 권력의 방향을 가르는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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