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과 관세 갈등을 겪는 캐나다가 유럽연합과의 관계를 회원국에 가까운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마크 카니 총리는 EU에 정식 가입하지 않으면서도 전략 공급망과 시장 접근, 국방 협력에서 유럽과 더 깊이 연결되는 구상을 추진 중이다. 수십 년간 미국 중심으로 짜인 경제와 외교의 축을 다변화하려는 움직임이다.
월스트리트저널 보도를 인용한 연합뉴스에 따르면 카니 총리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에 그치지 않고 정부 관계자들에게 구체적인 통합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미국과의 관계 악화에서 발생하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유럽 쪽 선택지를 넓히려는 것이다. 일부 유럽 지도자는 캐나다를 농담 섞어 EU의 새로운 회원국처럼 부를 정도로 양측 접촉이 활발해졌다.
캐나다가 실제 EU 회원국이 되는 방안은 현재 논의의 중심이 아니다. 대신 영국과 노르웨이, 스위스처럼 정식 회원국이 아니면서도 EU와 여러 협정을 통해 시장과 제도에 연결된 사례를 분석하고 있다. 카니 총리는 ‘EU 준회원국’ 같은 새로운 명칭까지 제안하며 기존 틀보다 유연한 관계를 모색한 것으로 전해졌다.
카니 총리, 유럽 지도자들과 연쇄 접촉
카니 총리는 취임 뒤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등 주요국 지도자를 공개적으로 만났다. 동시에 유럽의 소국 지도자와 왕실 인사들과도 폭넓게 접촉했다. 이 과정에서 캐나다와 EU가 경제·안보 분야에서 어느 수준까지 결합할 수 있는지가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EU는 회원국 규정과 단일시장 원칙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데 신중한 편이다. 그럼에도 양측 관계자들은 캐나다의 제안에 유럽 측이 비교적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민주주의와 법치, 사회정책에서 공유하는 가치가 많고 기존 자유무역 협정과 안보 협력의 기반도 있다는 점이 접점을 넓히는 요소다.
실무 논의는 에너지와 인공지능, 배터리와 반도체에 필요한 핵심 광물, 국방 등 전략 분야에 집중되고 있다. 캐나다는 풍부한 자원과 북미 생산기반을 갖추고 있고 유럽은 대규모 시장과 산업 규제 체계를 보유한다. 공급망을 연결하면 양측 모두 미국과 중국에 대한 특정 분야의 의존을 낮출 여지가 있다.
특히 핵심 광물은 전기차 배터리와 반도체, 방위산업에 필수적이다. 유럽은 안정적인 조달처가 필요하고 캐나다는 자원 개발과 가공 산업에 투자를 유치하려 한다. 에너지와 방산에서도 대서양을 사이에 둔 장기 계약과 공동 투자가 가능하지만, 실제 성과를 내려면 운송 비용과 인허가, 환경 기준을 조율해야 한다.
미국과의 관세 갈등이 전환점
캐나다가 유럽 쪽으로 속도를 내는 배경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뒤 심화된 관세 갈등이 있다. 캐나다 경제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미국 시장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통상 마찰의 충격이 크다. 카니 정부는 미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기보다 협상력을 높일 대체 시장과 파트너를 확보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유럽과의 밀착이 미국 시장을 단기간에 대체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한 미국 관계자는 미국이 세계 소비시장에서 차지해 온 역할을 줄이는 상황에서 캐나다와 EU가 서로의 생산품을 충분히 흡수할 준비가 됐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거리와 물류, 소비시장 규모, 기존 공급망 구조를 고려하면 전환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EU 내부에서도 캐나다의 진정성을 확인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유럽 관리들은 캐나다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얻기 위해 EU를 일시적인 지렛대로 활용하는 것은 아닌지 살피는 것으로 전해졌다. 장기 협력을 위해서는 정권이나 통상 환경이 바뀌어도 유지될 제도적 약속이 필요하다.

캐나다 국내 여론도 변수다. 카니 총리는 미국과의 관계 악화 이후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EU 제도에 가까워질수록 국민이 부담해야 할 비용과 규칙도 구체화될 수 있다. EU 시장과 깊게 연결된 비회원국은 예산을 분담하거나 노동자 이동을 허용하고 상당수 EU 규정을 따르는 경우가 있다.
이런 조건은 지역별 정치 갈등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 분리주의 성향이 강한 퀘벡주와 앨버타주에서는 연방정부가 유럽 규칙을 받아들이거나 새로운 재정 부담을 지는 데 반발할 수 있다. 자원과 산업 구조가 다른 각 주가 협력의 이익과 비용을 다르게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16일 유럽의회 연설이 첫 시험대
카니 총리는 오는 16일 유럽의회 연설에서 캐나다와 EU의 연계 구상을 구체적으로 밝힐 예정이다. 이후 양자 정상회담에서는 전략 분야별 실무그룹 출범이 발표될 가능성이 있다. 실무그룹이 만들어지면 공급망과 규제, 투자, 국방 협력의 범위와 일정이 보다 선명해질 전망이다.
캐나다의 구상은 미국과 유럽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단순한 외교 이동이라기보다 위험을 분산하는 전략에 가깝다. 미국은 여전히 최대 교역 상대이지만, 관세와 정치 변화에 따른 충격을 줄이려면 유럽과 아시아의 비중을 높일 필요가 있다. EU도 안정적인 자원과 안보 파트너를 확보하려는 이해가 있다.
관건은 상징적인 ‘준회원’ 표현이 실제 시장 접근과 공동 투자로 이어지는지다. 양측이 분담금과 규제 준수, 노동 이동 같은 민감한 조건을 어떻게 조정할지에 따라 협력의 깊이가 결정된다. 카니 총리의 유럽의회 연설과 후속 정상회담은 캐나다가 북미의 유럽이라는 별칭을 실질적인 정책으로 바꿀 수 있을지 가늠하는 첫 무대가 될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