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드라마에서 인물의 감정과 관계를 세밀하게 그려온 안판석 감독이 12일 별세했다. 향년 64세. 최근 뇌출혈로 쓰러진 뒤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방송을 앞둔 드라마 ‘연애박사’ 제작진은 부고를 전하며 유가족이 조용히 작별할 수 있도록 장례 절차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동료들이 전한 추모
MBC 입사 동기인 아나운서 출신 백지연은 고인을 멋진 감독이자 좋은 친구로 기억하며 애도를 표했다. 배우 김혜은은 ‘밀회’를 함께한 경험을 떠올리며 감독의 말과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김명민과 차승원 등 여러 배우도 인터뷰를 통해 함께했던 현장을 회상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방송과 드라마 업계는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안 감독은 배우의 연기를 과장된 사건보다 일상의 미묘한 긴장 속에서 끌어내는 연출자로 평가받았다. 한 장면 안에서 시선과 침묵, 공간을 활용해 인물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이 그의 작품을 구분 짓는 특징이었다.
안 감독은 1987년 MBC 드라마본부 프로듀서로 입사했다. 조연출 과정을 거쳐 1994년 베스트극장 ‘사랑의 인사’로 연출에 데뷔했다. 이후 방송사와 제작 환경의 변화를 지나오면서도 현실에 뿌리를 둔 인물 서사를 꾸준히 선보였다.

‘하얀거탑’에서 ‘밀회’까지
대표작 ‘하얀거탑’은 병원 조직의 권력과 욕망을 밀도 있게 그리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내의 자격’, ‘밀회’, ‘풍문으로 들었소’에서는 계층과 제도 속 개인의 욕망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사회 구조에 대한 시선과 멜로드라마의 감정선을 함께 엮는 데 강점을 보였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 ‘졸업’에서는 사랑을 선택하는 인물들이 가족과 직장, 사회적 시선에 부딪히는 과정을 담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배우를 따라가는 화면과 생활감 있는 대사는 시청자가 인물의 감정에 오래 머물게 했다.
최근작 ‘협상의 기술’까지 안 감독은 장르가 달라도 인물의 선택과 권력관계를 중심에 뒀다. 빠른 사건 전개보다 표정과 대화의 결을 쌓아가는 방식은 배우의 역량을 돋보이게 했고, 함께 작업한 동료들이 그를 ‘배우를 성장시키는 감독’으로 기억하게 했다.
유작이 된 ‘연애박사’
오는 10월 방송을 앞둔 ‘연애박사’는 안 감독의 유작이 됐다. 제작진은 고인이 생전 마지막까지 현장에서 열정을 쏟았다고 전했다. 작품은 안판석 특유의 멜로 감성과 인물 중심 연출을 예고했던 만큼, 방송 과정에서 고인의 마지막 작업이 어떻게 완성될지 관심이 모인다.

메인 연출자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제작진과 출연진에게 큰 과제를 남겼다. 남은 후반 작업은 고인의 연출 의도를 존중하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지켜야 한다. 구체적인 제작 일정과 방송 계획은 향후 제작진의 공식 안내를 통해 확인될 전망이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5일 오전 9시 30분이며 장지는 서울시립승화원이다. 유가족은 장례 기간 동안 외부의 관심보다 조용한 애도의 시간을 요청했다.
안판석 감독은 약 40년 동안 한국 드라마의 변화를 현장에서 경험하며 자신만의 연출 언어를 구축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인물의 욕망과 관계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드라마가 얼마나 오래 기억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동료들의 추모는 한 감독의 죽음을 넘어 그가 만든 현장과 작품 세계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