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7일 한국에서 엔씨 김택진 공동대표와 크래프톤 장병규 의장을 잇따라 만났다. 이번 회동은 구체적 의제가 아직 공개되진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피지컬 AI(물리 AI)’와 로보틱스(로봇 공학)로의 확장에 무게를 두고 있다. 엔비디아가 게임 산업에서 축적한 가상 환경 구현 역량을 현실 로봇 학습에 연결하는 구상을 추진하는 가운데, 국내 양대 게임사의 기술·인프라 파트너십이 핵심 고리로 부상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로보틱스가 ‘한국의 다음 핵심 산업’이라는 메시지
황 CEO는 최근 방한과 관련해 “한국을 위한 깜짝 선물”을 언급하며 기대감을 키운 바 있다. 다만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투자 유망 분야로 ‘로보틱스’를 직접 지목하면서, 한국이 제조 기술과 AI 역량을 동시에 갖춘 만큼 두 영역의 융합이 로봇 산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발언은 엔비디아가 이미 한국 파트너 생태계에 대규모 인프라를 공들여온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10월 APEC 정상회의 계기로 방한 당시 삼성전자·SK·현대차·네이버 등과 함께 2030년까지 고성능 GPU 26만 장 공급 계획을 언급한 바 있다. 이번 회동 역시 ‘로보틱스’라는 산업 방향을 특정 파트너와 함께 구체화하려는 행보로 해석된다.
게임의 ‘시뮬레이션’이 로봇 학습으로 이어지는 이유
피지컬 AI는 게임이나 시뮬레이션에서 축적한 가상 환경 구현 기술을 로봇·무인체계 같은 현실 세계로 옮기는 접근을 뜻한다. 로봇이 실제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면 비용과 시간이 크게 들 수밖에 없는데, 이 문제를 가상 공간에서 미리 학습해 현실 적용 효율을 높이려는 전략이 핵심이다.
이 지점에서 게임사가 갖는 강점이 부각된다. 3차원(3D) 게임을 운영하면서 축적한 공간 인식, 물리 기반 상호작용, 캐릭터 행동 구현 같은 기술이 로봇의 ‘세상 이해’ 및 의사결정 로직과 맞닿아 있다는 평가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게임사가 대형 GPU 수요처이자, 로봇 학습에 필요한 시뮬레이션 데이터·소프트웨어 협력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엔씨: 게임 협력에서 ‘로봇 두뇌’·월드모델로 확장
엔씨와 엔비디아는 오랜 기간 게임 분야에서 협력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엔씨는 최근 ‘피지컬 AI’로의 전환 속도를 높이고 있다. 엔비디아에 따르면, 엔씨의 AI 자회사 NC AI는 현대로템과 함께 국방과학연구소(ADD) 국책 과제를 수주해 로봇의 ‘월드모델’ 개발을 총괄하고 있다. 월드모델은 로봇이 주변 환경을 이해하고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데 필요한 개념으로, 로봇 두뇌의 핵심 구성으로 거론된다.
또한 엔씨는 한화오션의 자율 용접 로봇 ‘AI 두뇌’ 개발 과제도 수주하며 로봇 적용 분야를 국방에서 조선·산업 현장으로 넓히는 모양새다. 이번 황 CEO의 김택진 대표 회동이 기존의 그래픽·게임 협력 축을 유지하면서도, 피지컬 AI 구현에 필요한 GPU 인프라와 소프트웨어 협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지 관심이 쏠린다.
크래프톤: 휴머노이드·온디바이스 AI를 앞세워 ‘엔비디아 밀착’
크래프톤 역시 로보틱스와 온디바이스(기기 내 연산) AI를 동시에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크래프톤은 지난해 4월 엔비디아 본사를 찾아 휴머노이드 로봇 협력을 논의한 바 있으며, 올해 초에는 피지컬 AI 법인 ‘루도 로보틱스’를 세워 로봇 두뇌 개발을 진행 중이다. 더불어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의 방산 합작법인(JV) 설립도 추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장병규 의장 회동에서는 휴머노이드 연구 및 인프라 확보와 더불어, 엔비디아의 온디바이스 AI 전략이 주요 의제로 거론된다. 엔비디아는 최근 AI PC ‘RTX 스파크’를 공개하며, PC 안에서 AI 에이전트가 사용자 비서 역할을 수행하도록 재설계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크래프톤은 클라우드를 거치지 않고도 기기에서 바로 연산하는 방식으로 AI 캐릭터와 기능을 확장해 온 만큼, RTX 스파크 같은 하드웨어 협업이 구체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한편 크래프톤은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 ‘인조이’에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스마트 조이’를 선보였고, ‘PUBG: 배틀그라운드’에는 상호작용형 AI 캐릭터 ‘PUBG 앨라이(Ally)’를 예고한 바 있다. 두 사례 모두 온디바이스 방식의 연산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휴머노이드 및 로봇 응용으로 이어질 여지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대와 관측이 엇갈리는 지점
이번 회동은 ‘로보틱스’로의 산업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벤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국내 게임사 입장에서는 세계 최대 AI 반도체 기업과의 접점이 GPU 등 핵심 인프라 확보, 글로벌 확장 기회로 연결될 수 있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도 게임사들이 보유한 가상 환경·시뮬레이션 역량을 현실 로봇 학습 생태계로 확장하려는 목적과 맞아떨어진다.
다만 현재로선 계약 규모나 투자 계획, 구체적 협력 범위가 확인되지 않았다. ‘깜짝 선물’의 실체도 공개되지 않은 상태여서, 회동이 실제 사업 성과로 이어질지는 추가 정보가 필요한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신중론과 기대론이 동시에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협력 의지를 확인하는 상징적 만남”일 수 있다고 보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게임을 넘어 로봇·방산으로 이어지는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향후 관전 포인트: 로봇 ‘학습-구현-하드웨어’의 연결
앞으로 시장에서는 엔비디아가 로보틱스 밸류체인을 어떤 방식으로 구축하는지에 주목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피지컬 AI의 성패는 단순히 알고리즘 개발에 그치지 않고, 시뮬레이션 학습부터 로봇 적용, 그리고 필요한 GPU·온디바이스 하드웨어가 실제 제품·서비스로 연결되는지에 달려 있다.
다음 단계로는 엔씨·크래프톤이 진행 중인 ‘월드모델’ 및 로봇 두뇌 개발 과제의 범위 확대 여부, RTX 스파크 등 온디바이스 AI 하드웨어와의 실질적 결합, 그리고 방산·산업 현장으로의 적용 속도가 핵심 지표가 될 전망이다. 회동이 협력 발표나 투자 실행으로 이어지는지 여부가 로보틱스 경쟁의 속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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