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전자 과발현으로 생기는 난치성 질환을 치료하는 리보핵산(RNA) 치료제를 더 정교하게 설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1일, 기초과학연구원(IBS) RNA연구단과 서울대 연구팀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단백질 복합체 ‘아고넛’의 조립 과정을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렸다.
“아고넛이 열리고 닫히는 순간”을 포착
세포 안에는 유전자의 과도한 발현을 억제하는 마이크로RNA(miRNA)가 존재한다. miRNA는 ‘아고넛’이라는 단백질과 결합해 단백질-RNA 복합체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유전자 발현을 제어한다. 다만 아고넛이 miRNA와 결합해 활성화되는 과정—즉, 복합체가 어떻게 ‘작동 상태’로 전환되는지—는 그동안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번 연구에서 핵심은 아고넛이 실제로 어떤 구조 변화를 거쳐 작동 준비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연구팀은 아고넛에 ‘샤페론’(단백질-구조가 제대로 만들어지도록 돕는 조력 단백질)이 결합된 복합체를 분리·정제한 뒤, 초저온전자현미경으로 구조를 분석해 조립 과정의 단계별 변화를 추적했다.
샤페론이 ‘공간’을 만들고, miRNA가 들어오며 구조가 전환
연구팀의 관찰에 따르면 샤페론은 아고넛을 일종의 ‘열린 형태(open state)’로 붙잡아 miRNA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miRNA가 그 열린 공간으로 들어가 결합하면 샤페론은 떨어지고, 아고넛은 ‘닫힌 형태(closed state)’로 전환된다.
즉, 활성화는 단순히 결합의 결과가 아니라, 구조의 재배열을 포함한 과정으로 이뤄진다는 점이 확인된 셈이다. 연구팀은 시험관 조건에서 아고넛 조립 과정을 재현했고, 그 결과 조립된 아고넛 복합체가 표적 유전자를 정확히 잘라내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도 함께 확인했다.
RNA 치료제 설계 시행착오 줄일 ‘이론적 근거’
이번 성과는 RNA 치료제 개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평가다. 연구팀은 아고넛에 효율적으로 탑재될 수 있는 RNA의 조건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차세대 신약 플랫폼으로 주목받는 작은 간섭 RNA(siRNA) 치료제의 화학적 구성 요소(일반적으로 RNA 골격에 덧붙이는 화학 잔기)가 아고넛 조립에 미치는 영향도 분석했다.
RNA 치료제는 표적 유전자를 정밀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다양한 난치성 질환 영역에서 연구가 진행돼 왔다. 하지만 실제 설계 과정에서는 최적 조건을 찾기 위한 실험 기반의 시행착오가 상당 부분을 차지해 왔다. 연구단장 김빛내리 IBS 단장은 “그동안 시행착오에 의존하던 RNA 치료제 설계에 분자적·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며, “향후 더 효율적이고 안전한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국내 첫 ‘조립 과정 규명’의 의미
단백질-핵산 복합체의 작동 원리를 규명하는 연구는 기초과학의 성과를 넘어 치료 기술의 ‘설계도’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번 연구는 단순히 복합체의 정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수준을 넘어, 활성화로 이어지는 조립의 동선(열림→삽입→닫힘)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한 단계 더 진전된 결과로 해석된다.
특히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핵심 단계가 구조 변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은, 향후 RNA 치료제가 목표로 하는 ‘효율’과 ‘안전성’을 동시에 높이기 위한 최적화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siRNA의 화학적 설계가 조립 과정 자체에 영향을 준다는 관찰은 제조·투여 전 단계의 파라미터를 과학적으로 조율하는 근거가 될 전망이다.
앞으로 무엇이 바뀔까
연구진이 제시한 조립 메커니즘이 축적되면, RNA 치료제 후보 물질의 탐색이 더 빠르고 예측 가능해질 수 있다. 향후에는 아고넛-관련 복합체가 다양한 조건에서 어떻게 동작하는지, 그리고 특정 질환 표적에서 어떤 설계가 최적의 효율과 최소 독성을 보이는지에 대한 후속 연구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국내 연구 역량을 바탕으로, RNA 치료제 상용화를 앞당기기 위한 플랫폼 고도화도 추진될 수 있다. 연구팀의 다음 과제는 조립 과정의 원리를 치료제 후보 설계로 연결하는 단계—즉, ‘구조 기반 설계’가 실제 임상 효능으로 이어지는지를 검증하는 작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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